【국가사기와 국가범죄 정동희 스터디Ⅰ : 프랑스대혁명 근본원인과 이를 역으로 이용한 국가사기 】

국가사기와 국가범죄 정동희 스터디 : 프랑스대혁명 근본원인과 이를 역으로 이용한 국가사기

매우 무거운 주제이나 현 시점에서 반드시 공부해야 할 대목이라서 오늘 2차례에 걸쳐 국가사기와 국가범죄 대표 사례를 이야기드리겠습니다.

프랑스대혁명의 개요를 먼저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789년 7월 14일 민중들이 구체제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 장막을 무력으로 함락시키며 혁명의 포성이 격발되었습니다.

지속 기간은 약 10년 5개월이었고 종료 시기는 1799년 11월 9일이었습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를 집행하여 권력 서열 1위에 오르고 통령정부를 수립하면서 혁명의 장막이 공식적으로 걷혔습니다.

우리는 미국의 헐리우드 등이 만든 이 혁명의 가짜 원인은 앙투아네트의 사치로 알고 있는데. 근본적인 원인은 프랑스가 미국 독립전쟁에 천문학적인 군사비 지원을 해주어 국가 재정 바닥이 난 게 근본 원인입니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 사실은 미국은 이 막대한 채무를 매우 엉뚱한 이유로 갚지 않은 국가사기 구조가 내포되었다는 점입니다.

이제 이를 상술하겠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진짜 배후: 단면과 본질

왕족의 사치와 국고 바닥은 혁명의 눈에 보이는 ‘도화선’이었을 뿐, 근본적인 원인은 구체제(Ancien Régime)의 대대적인 구조적 모순이었습니다.

1. 국고 바닥의 진짜 주범: 사치가 아닌 ‘전쟁 빚’

미국 독립전쟁 올인: 프랑스 국고가 파산 직전에 이른 결정적인 계기는 왕실의 사치 때문이 아니라, 영국의 패권을 꺾기 위해 미국 독립전쟁에 천문학적인 군사비를 지원(올인)했기 때문입니다.

부채의 악순환: 왕실의 유흥이나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로 소모된 예산은 국가 전체 예산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었습니다. 진짜 국가 재정 기강을 무너뜨린 것은 눈덩이처럼 불어난 국가 부채의 이자 지급이었습니다.

2. 구체제의 모순(Ancien Régime)과 면세 장막

지배층의 면세 특권: 당시 프랑스 인구의 단 2%를 차지하던 제1신분(성직자)과 제2신분(귀족)은 국가 토지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으면서도, 세금을 단 한 푼도 내지 않는 특권 장막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제3신분의 독박 과세: 국가 재정의 100%를 부담한 것은 상인, 의사, 변호사 등 지식인층(부르주아지)과 빈곤한 농민들로 구성된 제3신분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든 세금 전선을 감당하면서도 정당한 정치적 발언권을 전무하게 박탈당하고 있었습니다.

3. 시위를 당긴 방화쇠: 기근과 귀족의 저항

자연의 침공(흉작): 혁명 직전 수년간 이어진 극심한 가뭄과 겨울 한파로 인해 빵값이 폭등했고, 민중들은 길거리에서 굶어 죽어가는 한계 상황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귀족의 기강 해이: 재정 파산을 막기 위해 국왕과 재무장관들이 귀족과 성직자에게도 세금을 걷으려(재정 개혁) 하자, 기득권 귀족들이 이에 격렬하게 저항하며 국왕의 통제를 거부했습니다. 이 귀족들의 반발이 역설적으로 혁명의 첫 단추인 삼부회 소집을 격발했습니다.

자, 이제 오늘의 스터디 대상인 ‘국가사기’로 넘어가봅시다.

역사학자들도 프랑스 혁명사에서 가장 거대한 모순이자 아이러니로 꼽는 전선이 바로 그 대목입니다. 영국의 패권을 꺾기 위해 격발한 국가적 결단이, 도리어 자국 왕실의 목을 베는 부메랑으로 돌아온 역사의 인과관계를 세 가지 서열로 이야기 드립니다.

1. 적의 적을 돕다가 맞이한 파산 (재정적 아이러니)

프랑스 부르봉 왕조는 7년 전쟁 등에서 앙숙이었던 영국에 복수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1770년대 후반 미국의 독립전쟁 전선에 군대와 천문학적인 자금을 아낌없이 투입(올인)했습니다. 당장 영국의 세력을 꺾는 데는 성공했으나, 정작 프랑스 국고는 완전히 밑바닥이 드러나 파산 선포 직전의 가짜 문명 상태로 전락했습니다. 영국을 골탕 먹이려다 자국의 경제적 기강이 먼저 무너진 셈입니다.

2. 혁명의 사상을 수입해 온 군대 (사상적 아이러니)

더 치명적인 반전은 미국 전선에 파병되었던 프랑스 군대와 지식인(라파예트侯 등)들의 머릿속에 일어난 변화였습니다. 이들은 영국 왕정의 압제에 저항하여 자유와 독립,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미국의 독립 혁명 전선을 현장에서 온몸으로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귀국한 뒤, “왜 우리는 남의 나라의 자유를 위해서는 피를 흘리면서, 정작 우리 자신의 땅에서는 국왕과 귀족의 가짜 장막 아래 노예처럼 살고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품고 프랑스 혁명의 핵심 무력으로 거듭났습니다.

3. 결국 최후의 승자가 된 영국 (지정학적 아이러니)

루이 16세는 영국의 힘을 빼놓으려다 재정이 파탄 나 결국 단두대에서 소탕당했습니다. 반면, 프랑스가 혁명의 폭풍과 나폴레옹 전쟁이라는 25년간의 대혼란(파산과 전쟁)에 휩싸여 전력을 소진하는 동안, 영국은 산업혁명을 완수하며 전 세계 바다와 자본을 독점하는 ‘해하지 않는 제국’으로 치고 나갔습니다. 영국을 주저앉히기 위해 당긴 활시위가, 결과적으로 영국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밀어 올려준 꼴이 되었습니다.

💡 중간 결론

윌리엄 텔이 사과를 향해 모든 것을 걸고 활시위를 당기듯 앙숙 영국을 향해 날린 프랑스 왕실의 화살은, 영국의 방패를 뚫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와 자신들의 가슴에 박혔습니다. 거시적 통찰 없이 적개심만으로 참전한 전쟁이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점은 역사가 증명하는 가장 완벽한 정조준의 아이러니입니다.

근대사 초대형 국가사기의 시작은 미국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하겠습니다.

자국의 국고를 탕진해가며 미국의 탄생을 도왔던 프랑스 왕조(부르봉 왕가) 입장에서 보면, 미국은 그야말로 배은망덕한 나라처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프랑스가 피와 돈을 흘려 도와줬음에도 미국이 보답은커녕 철저하게 동맹을 배신하고 외면했던 세 가지 결정적 이유(장막)를 가짜로 둘러대며 돈을 떼먹습니다.

1. “돈 빌려준 사람이 목이 잘렸다” (채무 대상의 소탕)

계약 주체의 소멸: 미국 독립정부가 돈을 빌리고 원조 협정을 맺은 대상은 ‘프랑스라는 국가’가 아니라 ‘루이 16세와 부르봉 왕실’이었습니다.

상환 거부 장막: 그러나 프랑스 혁명이 터지면서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서 소탕당했고 왕조는 파산하여 사라졌습니다. 이후 들어선 프랑스 혁명 정부가 미국에 “예전에 빌려 간 독립전쟁 빚을 갚으라”고 요구하자, 미국은 “우리에게 돈을 빌려준 루이 16세 국왕이 당신들 손에 죽었으니, 우리는 새 정부에 빚을 갚을 법적 의무가 없다”며 면세 장막을 치고 채무를 백지화해 버렸습니다.

2. 미국의 국력 한계와 고립주의 전술 (중립 선언)

올인할 여력의 부재: 독립 직후의 미국은 이름만 국가일 뿐, 군대도 경제도 기강이 잡히지 않은 신생 약소국에 불과했습니다. 프랑스를 돕기 위해 유럽의 거대한 전쟁(프랑스 혁명 전쟁) 전선에 뛰어들 힘이 전혀 없었습니다.

조지 워싱턴의 중립 선언: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1793년 ‘중립 선언(Proclamation of Neutrality)’을 격발했습니다. 미국의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막대한 채무를 갚아야 하는 프랑스 부르봉 왕조가 위험에 처하자 ‘유럽의 가짜 명분 싸움에 휘말려 신생 미국이 다시 파멸하는 것을 막는다’는 배은망덕한 논리를 펴며, 프랑스와의 기존 동맹 조약을 가차 없이 폐기하고 철저한 고립주의로 돌아선 것입니다.

미국은 자신들을 도와준 프랑스를 등지고, 1794년 적국이었던 영국과 ‘제이 조약(Jay Treaty)’을 체결하며 경제적 실리를 챙겼습니다. 이에 격분한 프랑스 혁명 정부가 미국의 무역선을 나포하면서, 보답은커녕 도리어 두 나라가 바다에서 정면 충돌하여 소규모 전쟁(유사전쟁, Quasi-War)을 벌이는 파국으로 치달았습니다.

💡 최종 요약

미국의 이 거대한 국익 중심의 배신 정국은 근본적인 구조가 국가사기입니다.

미국은 프랑스 왕실의 ‘희생’을 발판 삼아 탄생했지만, 왕실이 어려울 때 발을 뺏고 왕실이 소탕당하자마자 자국의 생존과 실리만 추구하는 규칙에 따라 프랑스를 배신했습니다.

미국의 이 거대한 국익 중심의 배신 정국은 근본적인 구조가 국가사기입니다. 왜냐하면 국제법이든 당시법이든 부로봉 왕조의 왕이 단두대에 처형되더라도 그 후대 자식들의 승계권이 있고 이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미국은 프랑스 왕실의 전폭적인 ‘희생’에 가까운 원조(약 13억 리브르에 달하는 군비와 해군 지원 등)가 없었다면 영국의 압도적인 군사력을 이겨내고 탄생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고 부르봉 왕조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미국은 다음과 같은 냉혹한 국가사기의 길을 걸었습니다.

1. 중립 선언과 동맹 무력화 (1793년)

프랑스 혁명 정부가 영국과 전쟁을 벌이게 되자, 당시 미국의 조지 워싱턴 대통령과 토마스 제퍼슨, 알렉산더 해밀턴 등 국부들은 1793년 ‘중립 선언(Proclamation of Neutrality)’을 발표했습니다. 1778년에 맺었던 ‘미프 동맹 조약(Treaty of Alliance)’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생 국가인 미국이 유럽의 거대한 전쟁에 휘말리면 생존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사실상 프랑스 왕실과의 의리를 저버린 것입니다.

2. 법적 정통성(승계권) 무시와 ‘국가 사기’

저는 법리적 관점은 매우 핵심적인 맹점을 짚고 있습니다. 당시 국제법적 관습이나 군주제 하의 정통성(Legitimacy) 기준으로 보면,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더라도 부르봉 왕조의 법적 권리와 후대 자식들의 승계권은 엄연히 존속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미국은 “우리가 맺은 조약은 ‘프랑스 왕국(국가)’과 맺은 것이지, 특정 왕조나 개인과 맺은 것이 아니다”라는 논리를 내세워 혁명 정부 및 이후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과 협상을 이어갔습니다. 심지어 1794년에는 영국과 ‘제이 조약(Jay Treaty)’을 체결하며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더욱 고립시켰는데, 이는 프랑스 입장에서 명백한 배신이자 미국의 거대한 국익 중심 ‘국가 사기 정국’으로 비쳐지기에 충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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